나는 노력의 가치를 안다. 어쩌면 나 자신이 나보다 더 재능 있는 친구들을 더 많이 봤기에 그 간격을 줄이기 위해 노력이라는 것에 엔진에 힘을 실어 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재능은 타고난 것이고 달라질 수 없지만 노력이라는 것은 자신의 의지 여하에 따라 인생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안철수의 책에서 다음과 같은 문구를 읽은 적이 있다.

“어떤 문제에 부딪히면 나는 남들보다 시간을 두세 배 더 투자할 각오를 한다. 그것이야말로 평범한 두뇌를 가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나는 이 말이 누구보다 공감이 간다. 이것이 내가 택한 공부의 전략이었고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온 길잡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나에게 있어 중 3이라는 시절은 지금까지의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때 일년으로 인해서 내 인생의 가치관과 인생관은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고 지금의 나로 살아오게 된 가장 큰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난관에 부딪힐 때가 많다. 해답은 보이지 않고 도움을 청할 곳은 없고 시간은 자꾸만 흘러가고 있고…… 해답은 보이질 않지만 무작정 걷거나 뛰어야 할 때가 있다. 목적지는 보이지 않지만 나 자신을 믿고 발걸음을 계속 떼어야 할 때가 있다. 밑 빠진 독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무작정 물을 부어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런 노력 속에서 시간이 지나면 목적지가 흐릿하게나마 보이고 밑 빠진 독에 물이 차오르는 경험을 할 때가 있었다. 그게 나의 중 3 시절이었다.

나는 국민학교(그 당시는 초등학교가 아니라 국민학교라고 불렀다) 때 공부를 잘했었다. 지금은 가물가물하지만 학교 수업만 듣고 전과 몇 번만 봐도 대부분 반에서 1등 아니면 2등이라는 성적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공부한다는 개념도 별로 없었고 그냥 재미있게 놀면서 학교생활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구에서 명문 학군인 수성구의 명문 학교에 가고 싶었던 나는 경신 중, 대륜 중, 덕원 중의 하나에 걸리기를 기대했지만 엉뚱하게 오성 중학교라는 생각지도 않았던 학교로 가고 말았다. 이 학교에 산을 깎아서 만들었기 때문에 올라가려면 한참을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올라가야 하고 학교 건물이 완전 하얕게 되어 있어 정신 병동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밑에 사진에 보면 알겠지만 산 중턱에 있는 학교다. 덕분에 중학교 3년 동안 엄청난 운동을 할 수 있었다). 아무튼 이 학교에서 중학교생활을 시작하게 되었고 3년 동안 재미있었던 추억 거리를 만들면서 지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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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중학교 사진 (출처: 오성중학교 홈페이지)

국민학교 때 공부를 착실히 했던 탓에 반에서 배치 고사 1등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56명 정도가 한 반이었고 10반이 있었으니 전교 10등 안에는 들었으리라 생각이 된다. 학기 초 1학년 담임 선생님께서 내 이름을 부르고 반 1등이라서 학습 부장으로 임명할 때까지도 나는 중학교 공부도 국민학교 때와 같이 하면 충분히 잘 해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중학교 공부는 국민학교 공부와 너무 달랐다. 국민학교 때는 사실 공부를 한다는 개념도 별로 없었다. 그냥 학교에 가서 열심히 수업을 듣고 학원에 가고 집에 가서 전과를 보면서 복습하는 것이 다였던 나는 그렇게 하면 중학교도 1등 아니면 2등이 나올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큰 실수였다. 우선 대구에서 제일 좋은 학군이었던 수성구 학군이었기 때문에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이 많았고 경쟁도 국민학교가 있었던 동구 학군과 비교하면 아주 치열했다. 사실 국민학교 때는 공부할 양이 많이 없어서 학원에 다니고 전과를 보면서 밤에 1~2시간만 공부하는 것이 다였다. 하지만 본인이 다녔던 중학교는 중간고사만 해도 15과목의 시험을 치를 만큼 많은 양을 중학생들이 공부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고 이런 양에 익숙하지 않았던 나는 점점 대충대충 수업을 따라가게 되고 나중에는 공부를 등한시하게 되었다

난 중학교 때까지 잠이 참 많았다. 학교 갔다 와서 9시 정도면 꼭 잠이 들었으니 하루에 9시간에서 10시간 정도를 자면서 중2 때 까지는 학교에 다녔던 것 같다. 하루는 어머니가 그런 나를 보면서 답답해서 곤히 자고 있는 나를 깨운 뒤 공부 좀 하라고 할 정도였으니 잠이 얼마나 많았는지 지금도 상상이 안 간다.

잠도 많고, 공부는 별로 안 했고 매일 친구들과 어울려서 농구하고 축구하고 놀았으니 성적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공부에 익숙해서였는지 다행히 그렇게 많이 떨어지진 않고 반에서 5등 안에는 거의 들었던 것 같다. 2학년 때에 반에서 노는 것은 대담해져서 아이들을 주도해 가면서 놀았고 수업 시간에는 만화책, 도박 그리고 장난으로 가득 차 있었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중학교 2학년 2학기 때 과학고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내가 과학고를 지망할 때는 과학고는 실로 꿈의 학교였다. 그 시절에 과학고에 들어간다는 것은 서울대에 가는 것만큼 힘들었다. 대구에 70여개의 중학교가 있었는데 그중에 120명만 입학한다는 과학고, 그리고 과학고에 입학하고 그곳 공부를 어느 정도 따라가기만 하면 서울대 합격은 떼 놓은 당상이라는 사실에 너무 매료되었다. 대구에서 내로라하는 수재들이 모여서 1학년이 끝나면 고등학교 과정의 수학, 물리, 화학은 대부분 진도가 끝나고 대학교의 수학과 물리, 화학 과정을 심화 학습한다는 사실이 나에게 적잖아 매력으로 다가왔다. 분명히 이 학교에 들어가기만 한다면 내 인생은 크게 바뀔 것이고 내가 성장할 수 있는 큰 기회라고 생각했었다. 중학교 3학년을 시작할 때 학교에서 과학고 반을 따로 만든다고 말이 나왔다. 그리고 과학고를 지망하는 학생들을 따로 모아서 교육하기로 결정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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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과학고 전경 (출처: 대구과학고 홈페이지 포토앨범) : 예전에 내가 다니던 학교와 달리 건물이 많이 업그레이드 되어 있다.

그러나 그 학교에 지원하는 것도 나에게는 벅찬 상태였다. 당시 과학고 지원 자격은 2학년 1학기부터 3학년 1학기까지 전교 석차 전체 3% 이내 혹은 국·영·수 과학이 모두 ‘수’이면 가능했다. 첫 번째 조건으로는 중학교 2학년 때 전교 50등 정도였던 나는 꿈도 못 꿀 형편이었고, 두 번째 조건은 내가 국어를 별로 잘하지 못해서 위태로웠다. 그리고 2학년을 마칠 즈음 국어 성적이 평균 86점이 나와서 거의 포기를 하고 있었는데, 평균 86점부터 ‘수’라는 기적이 일어나서 다시 한번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아직도 그게 어떻게 ‘수’가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사실 90점이 넘어야 ‘수’를 받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아니면 그때 점수에 따른 백분율로 했을지도 모른다.) 만일 그때 국어를 ‘수’를 받지 못했으면 내 인생이 어떻게 바뀌었을지 참 궁금하다.

그렇게 3학년이 되자 과학고에 정말 들어가고 싶었다. 한 학교에서 한 명 들어가기도 힘들다는 과학 고등학교, 불가능이라는 벽이 있었지만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내 가능성을 한번 시험해 보고 싶었다.

학교에서 만들어준 과학고 반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그 내에서도 많은 패가 갈려져 있었다. 잘하는 애들은 잘하는 애들끼리 노는 분위기였고, 나 같이 별로 가능성도 없는데 과학고 반에 들어온 애들은 그들끼리 또 시시덕거리며 노는 분위기였다. 솔직히 잘하는 애들이 못하는 애들을 무시하는 것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특히 그런 것 때문에 꼭 과학고에 들어가야겠다고 다짐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전까지는 중학교 들어와서 마음먹고 공부한 기억이 별로 없었다. 학교 수업 시간에 수업 듣고 문제집 조금 풀어 보다가 시험 치는 식으로 대충대충 공부했던 나는 중 3이 되자 수학, 과학에 기초가 너무 부족해서 힘들었다. 특히 과학고의 당락을 결정하는 것이 수학, 과학인데 학원에 다닌 것도 아니고 공부를 열심히 한 것도 아니라서 너무 불안했었다.

과학고에 들어가겠다는 결심을 하고 나서 우선 나는 잠을 줄이기 시작했다. 무조건 새벽 4시 전에는 자지 않았다. 그것은 나 자신과의 처음으로 굳게 한 약속이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지키려고 노력을 했었다. 방에 찬 물을 떠 놓고 잠이 올 때마다 세수했다. 잠이 오면 꼬집고 뺨을 때리고 벽을 치면서 공부를 했었다. 고무줄도 갖다 놓고 잠이 올 때마다 자신을 학대했던 기억도 난다. 그러고 새벽 6시에 일어나서 학교로 향했고 깨어 있는 모든 시간을 책과 더불어 살았었다. 그리고 쉬는 시간도 절대 함부로 보내지 않고 그 전 시간의 복습과 다음 시간의 예습을 했으며 점심시간에 밥을 먹으면서도 책을 봤다. 정말로 ‘공부 벌레’가 된 것이었다. 하루 2시간 수면, 22시간 공부를 정말 한 달 동안 거의 지키면서 살았다. 사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 지금도 나 자신이 생각해도 놀랍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중3 때 첫 중간고사를 보게 되었다. 첫 시험에서 전교 7등을 했다. 반에 전교 1등이 있어 반 1등을 하진 못했지만, 나에게는 나도 할 수 있다는 큰 자신감을 얻게 된 큰 계기가 되었다. 전 과목에서 6개를 틀렸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평균 97점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용기를 얻어 중간고사 이후부터는 새로 전략을 짜서 수학, 과학, 영어에 목숨을 걸기로 했다.

나는 수학을 잘하는 편이었지만 과학고 시험 수준에서는 형편없었다. 우선 중 1, 2때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기초가 없었고 과학고 입시 수준의 심화 문제가 나오면 도저히 손도 못 대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우선은 기초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중학교 3학년 1학기 때는 중학교 1학년 수학 문제집을 다시 공부했다. 한 달이 지난 후 중 1 수학을 다 떼고, 중 2 수학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공부하니 어느 정도 수학에 감이 오는 것 같았다. 원래 수학은 좋아했기 때문에 수학을 공부하는 시간이 제일 즐거웠던 것 같다.

중 3 수학 문제집은 거의 5권 정도 풀었던 것 같다. 한 몇 권 풀면 문제 경향이 거의 비슷비슷하다는 알게 되기 때문에 어려운 것을 하나 공략해서 풀었다. 당시 ‘A급 수학’이라는 문제집이 있었는데 그 문제들이 상당히 까다로웠다. A, B, C로 레벨이 나뉘어서 문제가 나와 있었는데, 나는 우선 문제집을 사자마자 답안지를 따로 분리했고 풀기 전까지는 답안지를 절대 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실제 그렇게 공부했다. 이 문제집의 A급 레벨의 문제는 상당히 까다로웠다. 거의 고 1의 공통 수학 수준의 문제도 있었고 어떨 때는 수2 정석을 찾아봐서 풀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A급 문제의 경우 나는 나 자신만의 노트를 만들어서 풀이 과정을 다 정리했다. 주관식의 경우 문제를 푸는 것뿐만 아니라 답안을 유도하는 과정도 상당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렇게 공부한 것은 내가 나중에 과학고에 가서도 큰 도움을 얻었다. 경시 대회를 준비할 때 답안 작성에 그렇게 많은 신경을 쓰지 않아도 그때의 습관으로 깔끔하게 답안을 작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떨 때는 한 문제를 가지고 사흘 동안 밤낮으로 골몰했던 적도 있었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에 그 문제만 가지고 생각하다가 결국 풀어내고 환호성을 질렀던 적도 있었다. 나는 조금씩 공부하는 재미를 알아 가고 있었다. 무언가에 도전하고 문제를 푸는 즐거움, 그리고 새로운 것을 알아 나간다는 즐거움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발전되어 나가고 있다는 즐거움에 나는 빠져들고 있었다.

과학의 경우는 어떻게든 문제를 많이 풀어 보는 수밖에 없었다. 당시 유행했던 ‘유니크 물상’을 중심으로 나는 우선 중 3 물상을 다 끝내고 이전에 부족했던 중 2, 중 1 것을 차례로 다시 보기 시작했다. 사실 생물은 거의 포기 상태였다. 외우는 것도 너무 많았고, 특히 내가 생물을 잘하지 못했던 것을 고려해 보면 거기에 투자를 하는 것보다 물상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이었다.

영어는 그런대로 점수는 잘 나왔지만 대부분 독해 지문을 읽고 해석하는 식으로 되어 있는 과학고 입시를 위해서는 단어를 무조건 많이 외우고, 독해를 많이 해보는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중3 때 약 2,000단어 정도가 정리되어 있던 단어장을 하나 사서 통째로 외워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독해 집을 사서 풀어나갔다. 특히 영어는 다시 한번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수학 같은 경우라면 외우고 익숙해지는 것보다는 사고력을 훈련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영어는 무엇보다도 많이 접해 보고 기억 속에서 되살리는 것이 필요하므로 그렇게 반복 학습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실 그렇게 해서 영어 실력은 많이 늘었던 것 같다.

중간고사 이후로 국·영·수 과학 외의 학교 공부는 수업 시간, 그리고 시험 기간 이외에는 별로 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공부에는 궤도와 관성이라는 것이 있다. 성적에는 관성이 있어서 처음 올릴 때는 힘들지만 한번 올라간 성적은 완전 포기하고 놀지 않는 한은 다시 떨어지기도 쉽지 않다. 습관이라는 것이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그 습관을 계속 유지하는 한은 자신이 위치하고 있는 궤도에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기말고사는 중간고사 보다는 잘 보지 못했지만 전교 8등으로 3학년 1학기를 마무리하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 후회가 되기도 하는 것이 학원에 다니지 않은 것이다. 중 1, 2 때는 학원에 다녔어도 수업 시간에 항상 떠들고 애들을 주동해가며 놀았기 때문에 제대로 공부해 본 기억은 거의 없다. 그래도 수학, 영어는 잘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가끔 선생님들 골려주려고 어려운 문제 들고 가서 물어보긴 했지만, 솔직히 그 당시에는 학원 가서 열심히 공부하는 타입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한동안 학원에 다니지 않으면서 공부했는데, 어머니가 이런 나를 보고 답답해서 가기 싫다는 나를 끌고 동네의 유명한 학원을 보냈던 적이 있다. 근데 그곳에 가서도 애들하고도 별로 적응하지 못하고 또 그 반이 공부 열심히 하는 분위기도 아니었고 해서 한 달 만에 그만두고 말았다.

하지만 학원에 다니지 않은 대신에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법을 많이 깨우치게 되었다. 내가 물어볼 상대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며칠 동안 골몰하다가 문제를 풀어내는 재미를 알게 된 것이다. 사실 그렇게 수없이 고민하는 가운데 사고력이 많이 길러 졌던 것 같다. 그렇게 수학 문제를 풀었기 때문에 수학 천재들이 넘쳐 난다는 과학고에 가서도 수학에서는 인정받으면서 공부했던 것 같다.

2학기에 접어들면서 국·영·수·과학 외에 모든 것은 포기했다. 사실 도박을 한 것이었다. 국·영·수 과학외의 과목에서는 점수를 잃더라도 배점이 큰 4대 과목에서는 반드시 점수를 많이 확보하겠다는 전략이었다. 그리고 국·영·수·과학 외의 수업 시간에는 무조건 다른 과목 공부를 했다. 가끔 선생님께 걸려서 두드려 맞은 적도 있고 다른 과목 숙제는 하지 않아서 혼난 적도 많았지만, 그 당시 나에게는 다른 선택이 없었기에 꿋꿋이 거기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2학기 중간고사에서는 101등이라는 석차를 받았다. 그전 학기에 전교 8등이었던 것에 비하면 너무 많이 떨어진 것이라서 우리 반에서 내가 제일 많이 맞았던 사람 중의 하나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때 맞은 종아리는 일주일 동안 멍이 들어서 쓰라렸다.

과학고만 간다면, 내가 거기만 합격한다면 세상 어떤 시련도 견뎌낼 자신이 있었다. 지금까지 그것만 바라보고 중 3 시절 동안 쉬지 않고 달려왔는데 어떻게 포기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시험이 가까울수록 현실을 바라보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조금씩 초연해졌다.

‘다른 애들은 3년 동안 열심히 해서 그리고 대구에서 날고 긴다는 애들이 지원하는데 그렇게 많이 놀던 내가 중 3 겨우 1년 공부해서 어떻게 합격할 수 있을까? 그냥 시험 쳐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자’ 그리고 나는 인문계 원서도 썼다. 1지망 경신고, 2지망 덕원고, 3지망 대륜고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과학고도 지원했다. 경쟁률은 5.8:1이었다.

시험 날 아침, 아버지가 차로 데려다 주셔서 시험장에 편하게 들어갈 수 있었다.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했던 것 같다. 과학 고등학교 교정을 걸으면서도 한 번 들어왔다는 것을 내 발이 기억하도록 조심스럽게 걸었던 것 같다.

시험은 어려웠다.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라 역대 최고로 어려웠다. 특히 수학에서 많은 친구들이 쩔쩔매고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들었다. 20문제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문제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풀어서 답안을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나머지 과목들은 기억나는 것이 별로 없다. 국어, 영어, 과학, 그리고 기타 과목들 별로 기억나는 것이 없다. 그리고 그때 책상에 붙어 있던 수험표를 떼고 시험을 마치고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학교를 기억할 것이다. 내가 여기서 실패했다 하더라도 이것을 계기로 좀 더 노력할 수 있는 동기가 될 것이다.’

그 수험표는 1년이 넘도록 그 뒤 내 지갑 속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몇 주일 뒤 나는 합격했다. 과학고에 다니는 아버지 친구 아들을 통해서 공고 하루 전에 개인적으로 연락을 받았다. 어머니가 그렇게 좋아하시는 것을 본 기억이 잘 없다. 그리고 아버지도 무척 좋아하셨다. 사실 그때까지도 믿기지가 않았다. 내가 해냈다니…….

이 때의 기억은 나를 평생 뒷받침해 주는 디딤돌이 되었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렇게 내 현실이 비관적으로 보인다고 할지라도 죽기 살기로 각오하고 노력하면 안 될 것이 없다는 것을 내 몸으로 체험해 본 그 어떤 것보다도 값진 경험이 되었다. 재능이 부족해도 그리고 시간이 부족해도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도전해 본 것이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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